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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기현의 택견이야기 하나] 엉거주춤해 보이던 ‘택견’ 미국서 “원더풀”

결련택견협회
2020-06-01 09:53 | 1,047

택견을 논함에 있어 가장 먼저 언급되어야 할 분이 있으니 바로 송덕기(宋德基, 1893~1987, 초대 택견인간문화재)스승님이시다. 현재의 택견을 있게 한 택견 역사의 산증인이신 분으로, 필자가 스승님을 처음 뵌 것은 대학교 2학년이었던 1982년 4월의 어느 봄날이었다.

수소문 끝에 아주 어렵게 스승님의 거처를 알아내고 마냥 흥분해서 스승님을 찾아갔던 그날의 기억이 아직도 새롭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89세 고령의 전통무예의 달인을 만난다고 생각하니 긴 도포자락에 흰 수염을 휘날리는 아주 신비하고 우아한 모습의 고수를 기대했고, 그런 분에게 배움을 청하러 가는 필자는 마치 어떤 무협영화의 주인공이 된 듯한 기분이 들었던 것이다.

그러나 직접 만나 뵙게 된 스승님의 외모는 필자가 상상했던 것과는 완전히 다른 아주 평범한 노인의 모습이었고, 엉거주춤해 보이던 택견의 동작들이란.... 필자는 곧바로 큰 실망을 하고 말았다. ‘품밟기’(택견의 기본 발동작) 와 ‘활갯짓’(택견의 기본 팔동작)을 배우면서도 그저 굼실거리고 그저 흐느적거리기만 하는 것 같아 ‘내가 이딴 걸 계속 배워야 하나?!’ 하는 생각까지 했었다.

그런 외형적인 초라함이 당시 스승님의 명성을 듣고 찾아 왔던 적지 않은 사람들이 실망하여 발길을 돌리게 하였고, 스승님이 장수하셨음에도 불구하고 제자들이 아주 적은 이유 중의 하나일 것이다. 필자 또한 다른 사람들과 사정이 크게 다르지 않았으나 워낙 고생(?) 끝에 만났고 처음엔 혹시 뭐가 있지 않을까하는 기대감에서, 그리고 나중에는 스승님과의 인간적인 관계 때문에 그만 두지 못하고 대학시절을 스승님과 함께 하게 되었다.

솔직히 택견에 대한 자부심보다는 인연이라고 생각하고 그냥 그렇게 배웠던 것이다. 그랬던 필자가 택견이 얼마나 가치가 있는 것인가를 처음 깨달은 것은 부끄럽게도 한참이 지나서 그것도 미국에서의 경험 때문이었다.

필자가 대학을 졸업하고 미국으로 유학을 간지 일년 정도 되었을 때의 일이다. 필자가 다니는 대학이 있는 주의 주도(Indianapolis)에서 각 무술의 사범들이 자신들의 무술을 시범보이고 조금씩 가르쳐주는 무술세미나가 열렸다. 고수들이 출연하는 자리인지라 필자가 낄 자리가 아니었음에도 불구하고 처음으로 택견하는 사람이 왔다는 이유 때문에 필자도 게스트로 초청을 받았다.

모든 면에서 월등한 다른 무예 고수들의 시범이 끝나고 한참 주눅이 든 필자가 특별케이스로 마지막에 시범을 보였는데 막상 가장 인기가 많은 사람이 바로 필자였다. 필자의 택견시범이 끝나자마자 모두들 “원더풀(Wonderful)!”을 외치며 환상적이었다며 박수를 아끼지 않았다. 자기들이 그동안 한 번도 보지 못했던, 그리고 또 상상할 수도 없었던 너무나 독특하고 아름다운 동작들이었고 이런 신비한 동양무예가 왜 그동안 전혀 알려지지 않았는지 의아해 하였다.

어쨌든 필자는 본의 아니게 그날의 주인공이 되어 아낌없는 찬사를 받으며 처음으로 필자가 익힌 택견에 대한 뿌듯함을 가질 수 있었다. 택견을 익힌 지 한참이 지나서 그것도 먼 타향에서 외국인들에 의해서 말이다. 한 노인네의 세련돼 보이지 않던 그 몸짓이 대단한 가치가 있다는 것을 그때야 비로소 처음 깨달은 것이다.

어떤 것의 객관적 우수성을 논하기 전에 우리는 그것의 독창성에 주목해야 할 필요가 있다. 예를 들어 네덜란드 출신의 세계적인 화가 ‘빈센트 반 고흐(Vincent van Gogh, 1853~1890)’의 작품을 그대로 모사하는 것은 전문적인 화가들에게는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닐 것이다.

반 고흐의 작품이 뛰어난 이유는 테크닉적으로 난해해서 그렇게 그리기 어려워서가 아니라 그렇게 처음으로 그렸기 때문에, 그 독창성에서 위대한 것이다. 마찬가지다. 택견의 뛰어난 무예적 가치를 접어두고라도 우선 세계의 어느 무술도 그러지 못했던 독특한 몸동작을 가지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택견은 이미 문화적으로나 무예사적으로 대단한 가치가 있다는 것을 필자는 강조하고 싶다.

기존의 거의 대부분의 동양무예들이 ‘기마식(騎馬式)’에서 시작하여 ‘앞굽이(弓步, 前屈姿勢)’와 ‘뒷굽이(虛步, 後屈姿勢)’ 등의 보법을 바탕으로 주먹은 허리에서 나가는 것을 공통적인 기본으로 하고 있는데 반해 택견은 품밟기라는 독특한 보법으로 굼실거리면서 춤을 추듯 자연스럽게 움직이는 특성을 가지고 있다. 기존의 동양무예들과는 전혀 다른 체계와 방식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대단한 독창성이 아닐 수 없다.

품밟기에서 나오는 오금질(무릎의 연속적인 굴신운동)에 의한 굼실거림이나 흐느적거리는 듯한 활갯짓(팔 움직임) 등 마치 탈춤에서나 나올만한 우리민족의 몸짓으로 공방(攻防)이 가능한 맨손무예가 이루어지고 있다는 것은 실로 대단한 발견인 것이다. 사실 많은 문화유산이 기존에 존재하던 것들의 영향을 받는다는 점을 감안할 때 택견이 다른 동양무예적인 영향을 거의 받지 않고 독자적이고 독창적으로 이 땅에서 자생하여 전승되어 왔다는 사실은 높이 평가받아야 한다.

만일 송덕기라는 한 개인이 존재하지 않아 택견의 실제 몸짓이 전수되지 않았더라면, 또 어떤 사이비 무술가에 의해 문헌이나 고화에서 조금 나오는 택견이라는 무예가 기마식으로 다리를 쩍하니 벌리고 서서 팔을 태극권식으로 천천히 우아하게 움직이며 마치 장풍이라도 쏠 듯한 모습이라고 우기며 사기를 쳤을 수도 있었으리라. 그러므로 송덕기스승님께서 택견을 후세에 온전히 전수해 주신 것만으로도, 그리고 택견이라는 독특한 우리몸짓의 무예가 존재하는 것만으로도 문화적으로나 무예사적으로 대단한 가치가 있는 것이다.

 

 

본 칼럼은 2009년 무카스에 연재된 <택견꾼 도기현의 택견이야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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