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법택견은 혹시 강력한 궁중 호위무사의 무예가 아니었을까하는 상상을 해본다
2006년 어느 날, ‘(사)결련택견협회’의 사무국장이 흥분한 얼굴로 필자에게 와서는, “회장님, 꼭 한번 만나보셔야 할 분이 있습니다.”하는 것이었다.
사무국장은 ‘국립민속박물관’에서 매월 한 차례씩 시연단과 함께 택견 시연을 보여 왔었다. 그날도 시연단원들이 열심히 시연을 보이고 사무국장은 마이크를 붙잡고 택견에 대한 설명을 하고 있었다 한다. 택견에 대한 역사적 배경을 설명하면서 택견이 무형문화재로 지정될 당시 조사되었던 대로 택견이 서울 장안의 사직골을 중심으로 구리개, 왕십리 등 사대문(四大門) 안팎에서 민중들에 의해 매우 성행했었다고 했단다.
시연이 끝나자 한 어르신이 다가와 택견에 대해서 제대로 잘 알지도 못하면서 설명을 한다며 나무라셨다고 했다. 그 분은 정년퇴임한 선생님으로 현재는 국립민속박물관에서 고궁을 방문하는 사람들을 대상으로 우리문화 및 역사에 대한 도우미로 자원봉사를 하고 계시는 분이셨다.
택견에 대한 또 다른 사실을 알 수 있게 될 것 같아 사무국장은 그분의 연락처를 받으며 꼭 우리 회장님을 한번만 만나달라고 부탁드렸고, 기꺼이 그러시겠노라 하셨다는 소식을 나에게 흥분된 얼굴로 전달했던 것이었다.
그렇게 해서 그분을 뵙게 되었는데 우연이라고 하기엔 너무나 놀랍게도 필자의 고등학교 때 은사였던 ‘정영일(鄭英一,1940~ )’ 음악선생님이셨다. 25년 만에 처음 뵈었지만 워낙 인상이 깊었던 분이라 쉽게 알아볼 수 있었다.
매사에 빈틈이 없으시고 학생들의 조금의 일탈도 용서하지 않으셨던 그야말로 군사훈련을 가르치는 교련선생님보다도 더 무서운 분이셨지만 음악에 대한 열정과 가르침에 대한 정성만큼은 대단했던 아주 훌륭한 선생님이셨다.
사실 사무국장의 얘기를 듣고는 처음에는 부정적인 생각이 있었다. 그동안 자칭 택견 고수부터 시작해서 택견의 비기(秘技)를 안다고 하는 사람들을 여러 번 만나봤지만 대부분 필자에게 실망감만을 주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필자는 선생님을 뵙자마자 그분의 성품과 인격을 잘 아는지라 100% 신뢰를 할 수 있었다.
선생님의 말씀에 따르면 택견은 서울 사직동을 중심으로 현재의 태평로(통) 일대까지 매우 성행했었는데 정선생님의 집안은 대대로 서울 태평로에 사셨단다. 정선생님의 할아버님은 택견의 고수로 젊은 시절에는 태평통에서 알아주는 강자였고 이름난 택견꾼들과 자주 교류를 가지셨다고 한다. 영친왕(英親王, 대한제국의 마지막 황태자, 1897~1970)이 일본에 볼모로 끌려갈 때 영친왕을 호위할 5인 중의 한명으로 발탁되었으나 사정이 있어 집안에서 뺐다고 하셨다.
임금님께서 밤이면 민정을 살피기 위해 평상복으로 갈아입고 암행을 나가시곤 했는데 그때마다 궁중의 무사들이 무기를 들고 호위를 할 수 없어 택견의 고수들로 이루어진 무인들이 맨 몸으로 왕과 약간의 거리를 두고 호위를 했다고도 하셨다.
정선생님의 아버님(鄭老馬, 1900~1956) 또한 장안에서 알아주는 택견의 고수였으며 운동신경이 아주 뛰어나셔서 YMCA의 외국인 선교사에게 야구를 배웠던 초창기 멤버로 짚신을 신고 그 당시 동대문패의 왕초였던 ‘마춘식, 김정식’ 등과 함께 국내 최초의 야구시합도 했다고 한다. 나라가 망하고 일제의 탄압이 심해지자 만주로 건너가 독립군들에게 택견을 지도하셨으며 그런 연유로 결혼이 늦어져 외아들인 정선생님을 40세가 훨씬 넘어서야 얻으셨고 독립운동을 하다 얻은 부상으로 몸이 안좋아 아들인 정선생님에게는 택견을 전수하지 못하셨단다.
정선생님 말씀의 요지는 택견이 단순히 민중의 신명나는 놀이문화이고 사대문 밖에서도 행해졌다고 하는 것은 우리가 잘못 알고 있다는 것이었다. 서울 필운동에서 태평로로 이어지는 지역은 한량들이 주로 모여 살던 지역으로 그 곳의 택견이 가장 세었으며 그 외 지역으로는 현재의 을지로 6가 옛 훈련원 근처의 군인들과 남산 지역의 한량들이 더러 택견을 했을 뿐이라는 것이다. 당시 상황에서는 하층민은 택견수련을 할 수 없었고 최소한 중인 이상이나 양반인 한량과 무반(武班) 출신들이 즐겨했던 비교적 고급문화가 바로 택견이라고 하셨다. 그 당시 택견은 아주 강하고 살벌하여 궁중의 호위무사들이나 지역의 강자들이 수련했던 아주 강력한 무예라는 것이다.
비록 신뢰가 가는 은사님이긴 하지만 필자가 한 사람의 말만 듣고 이런 글을 쓰는 것은 아니다. 송덕기스승님과 친분이 많고 우리 역사를 잘 아시는 ‘황학정(스승님께서 평생 활을 쏘셨던 사직동에 있는 활터)’에 계신 어르신들을 비롯해서 그동안 여러 사람들에게서 이미 이와 비슷한 얘기들을 많이 들어왔던 터였다. 생각했던 것보다 의외로 많은 분들이 택견에 대한 여러 기억들을 가지고 계셨으며 그분들의 증언을 종합해 보면, 민속놀이 형태로 이어져 내려 온 택견도 있지만 상당히 강력한 무예적 기법들로만 이루어져 있어 한량들이나 무사들이 호신이나 수련의 한 방편으로 사용했던 택견도 존재했다는 것이다. 필자의 생각에 후자는 아마도 ‘옛법택견’을 가리키는 것이 아닌가 싶다.
'밟기'는 '밟아버린다'라는 표현을 잘 쓰는 우리민족의 대표적인 발길질 중의 하나이다. 온 몸의 체중을 이용하여 위에서 밑으로 밟아차면 상대를 일시에 절명케 할 수 있는 강력한 옛법택견의 기술이 된다.
한국통신 택견동아리를 지도할 때 한 부장님이 당신의 할아버지가 가르쳐 주신 택견기술이라며 활개뿌리기와 팽이돌리기를, 그리고 국제학술진흥원에서 수업할 때 수위아저씨는 역시 할아버지에게 배웠다며 곧은발질을 차보이기도 했다. 하나같이 경기에서는 쓸 수 없는 일격필살의 기술로 막강한 택견의 옛법이었다.
신한승(송덕기스승님의 큰 제자이며 택견의 인간문화재)선생님도 택견이 경기무예임을 알고 있었는데 택견에 남아 있던 손질을 중심으로 한 살상기술에 상당한 고민이 있었다. ‘이런 살벌한 기술들을 사용하면 사상자가 생겨 택견경기가 이루어질 수 없었을 텐데 도대체 이런 기술들은 무엇일까?’ 그러다가 손기술 위주의 ‘수벽치기’라는 것을 알게 되셨고 그것을 연구하다가 그만 갑작스럽게 생을 마감하시게 되었다. 현재 시중에 있는 수벽치기와 택견의 옛법이 어떤 연관이 있는지 필자로서는 정확히 알바가 없다. 다만 택견에는 발길질 중심의 경기무예 임에도 불구하고 경기에서는 절대 사용할 수 없는 손질 위주의 상당히 위험한 기술들이 전해져 오고 있다는 것이다.
송덕기스승님께서 결련택견(택견의 시합)에서는 절대 사용해서는 안된다고 하셨던 강력하고 위험한 ‘옛법’이라는 기술들이 바로 궁중무사들의 기법이 아니었을까?! 또한 스승님의 스승이시며 인왕산 호랑이로 불리셨던 임호선생님은 어느 누구도 감히 대적하지 못했을 만큼 강했다고 하니 혹시 임금님의 호위무사가 아니셨을까 하는 상상을 나래를 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