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련택견이란?
송덕기스승님
결련택견홍보실
결련택견칼럼
본터패
택견배틀

HOME > 결련택견 > 송덕기 스승님


조선의 마지막 택견꾼

고 송덕기옹(故 宋德基翁)

사단법인 결련택견협회 회장 도 기 현 

 

 조선의 마지막 한량으로 한 평생을 택견과 활로 보내신 송덕기스승님! 격동의 한 세기를 외롭게 홀로 남아 택견이라는 소중한 우리의 문화유산을 후세에 물려주신 살아있었던 조선의 마지막 택견꾼이시기도 하다. 당신이 계셨기에 오늘날의 택견이 이어지고 있으므로 송덕기스승님은 이 땅의 모든 택견꾼들의 영원한 스승일 것이다. 필자는 스승님을 모셨던 4년이라는 짧은 시간을 통해 스승님의 일부만을 알고 있을 뿐인데 스승님의 제자들을 대표하여 스승님에 대한 글을 쓴다는 것이 마냥 부담스럽기만 하다. 스승님의 택견을 다 배우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그 속에 함장된 택견의 깊은 뜻도 아직 깨닫지못하고 있기에 스승님에 대한 글을 쓴다는 것이 잘못하면 스승님에 대한 누가 될 수가 있으므로 걱정이 앞서는 것이다. 그러므로 될 수 있는 한 필자 개인의 의견이 아니라 스승님으로부터 들었던 얘기와 필자가 직접 본 사실만을 표면적이긴 하지만 최선의 노력으로 이 곳에 옮겨 택견을, 그리고 우리문화를 사랑하는 많은 분들에게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고자 한다



‘고 송덕기(故 宋德基, 1893-1987)스승님’은 1893년 1월 19일(호적에는 1896년생으로 되어 있으나 호적이 잘못되었다고 하셨다) 현재의 서울 사직공원 옆 필운동(경성부 필운정 35번지)에서 국가관리였던 ‘송태희(宋泰熙)씨’의 2남 3녀 중 막내로 태어나셨다(문화재관리국의 조사 자료나 기타의 여러 자료에는 7남 7녀 중 막내로 되어 있으나 잘못된 것임). 국가관리라 해도 낮은 관리였고 당시 나라가 어수선해서 직업도 확실하기는 어려웠지만, 모친(김씨)께서 잡화가게 등의 부업으로 생활은 비교적 여유가 있었기 때문에 넉넉한 어린 시절을 보내셨다. 스승님께서 태어나신 서울의 필운동을 비롯한 근처의 사직골, 누상동, 누하동 등은 마지막까지 택견이 남아 있었던 곳이자 또한 택견이 가장 성행했던 곳으로 택견의 ‘본터바닥’이라 불렸던 곳으로써 스승님 또한 어려서부터 여러 사람들과 어울려 자연스럽게 택견을 익히셨다. 12세 때부터는 지금의 배화여고 앞(필운동)에 살았던 당대(當代)의 이름난 택견꾼 ‘임호(林虎)선생님’에게서 비슷한 또래의 동네 소년 10여명과 함께 본격적인 택견 수업을 받기 시작하셨다. 임호선생님은 택견의 기량이 상당할 뿐만 아니라 힘 또한 장사여서 장안에서 알아주는 택견꾼으로 ‘인왕산 호랑이’라고 불리셨다. 임호선생님은 스승님보다 20년 정도 연상으로 과묵하고 점잖은 편이셨지만, 운동을 가르치실 때는 대단히 엄하셨다고 한다. 스승님은 임호선생님으로부터 지도를 받은 후 부쩍 실력이 늘어 16세쯤에는 마을의 택견꾼들과 함께 사직골을 대표하여 유각골, 옥동, 애오개 등의 택견꾼들과 겨루어 ‘결련택견판(택견의 시합을 지칭하는 말)’에서 이름을 날리기 시작하셨다. 스승님은 체격은 작았지만 동작이 날쌔면서 정확하셨고, 특히 솟구치며(뛰어오르며) 쓰는 발길질이 뛰어나 인기가 매우 많으셨다고 한다. 그 후로도 계속 열심히 임호선생님으로부터 사사를 받아 집안의 만류로 그만두던 때까지 약 10년 정도 택견을 배우셨다고 하셨다.



 17세 때에 결혼을 하셨고(사모님이신 ‘宋光姬여사’와는 여러 가지 사정으로 1937년, 스승님이 45세가 되시던 해에야 혼인신고를 할 수 있으셨다고 한다), 곧 군(軍)에 입대하셨으나 군대라도 지금과는 달라 일주일에 두 번 정도만 나가면 되었으므로 여전히 택견을 즐기시며 여러 결련택견판에 참가하셨고, 그 때 막 들어온 축구를 익히기도 하셨다. 그러나 한일합방 후 일제(日帝)의 탄압이 강해지면서 우리민족의 상무정신(尙武精神)이 깃들인 결련택견은 물론 개인적인 택견 수련마저도 철저히 금지 당했고 집안에서도 만류하는 바람에 택견 수련을 계속하기가 힘이 드셨다고 한다. 특히 스승님의 집안에서는 스승님께서 일본순사들에게 잡혀갈까봐 두려운 것도 두려운 것이지만, 스승님께서 싸움꾼이 될까봐 택견을 수련하는 것을 몹시 싫어하셨다고 한다. 그래서 택견 수련을 그만두는 대신에 활을 배우기로 하고 22세부터는 집 근처의 활터인 ‘황학정(黃鶴亭)’에서 국궁(國弓)을 시작하셨다. 스승님은 명궁(名弓)으로 소문이 나셨을 뿐만 아니라 돌아가시기 몇 해 전까지도 활을 잡아서 국내에서 활을 가장 오래 쏘신 분으로, 또한 최초의 국궁심판으로 ‘한국인물도감(1982)’에 소개되기도 하셨다. 스승님은 타고나신 뛰어난 운동신경으로 군대에서는 사병들에게 뜀틀과 철봉 등의 근대식 체조를 가르치기도 하셨고, ‘조선불교 축구단’에 선수로 발탁되어 월급80원(당시 쌀 한 가마니는 7원 70전)을 받고 선수생활을 하기도 하셨다. 23세 때 군을 제대하고 26세까지 축구선수 생활을 하면서 평양축구단과의 경기에 참가한 경력도 가지고 계셨다.



축구선수 생활을 그만두신 후에는 아마도 당신이 어려서부터 지켜 보아왔던 선배들의 한량적 기질이 몸에 배어 있음인지 특정한 직업 없이 그저 이것저것 많은 일을 해보셨단다. 40세 때에는 현재의 서울 인사동에 있었던 ‘조선극장’을 경영하는 매부를 도와 ‘기도(현재의 청원경찰과 비슷하다고나 할까?)’ 일을 하셨다. 당시에는 건달들이 많아 극장에는 꼭 기도들이 필요했는데 스승님께서는 뛰어난 솜씨로 건달들이 함부로 하지 못하게 하였을 뿐만 아니라, 이 때 ‘김두한(金斗漢, 1918-1972)’과도 겨룬 적이 있다고 하셨다. 스승님은 그 후 금을 캐보려고 몇 해 동안 돌아다니기도 하셨지만 어쨌든 별다른 직업 없이 운동으로 한평생을 즐기신 한량이셨으며, 1.4후퇴 때 경남 밀양으로 피난 가신 것을 포함해서 두 번 정도 잠시 사직동을 떠난 것 이외에는 평생을 사직동에서 사셨던 서울 토박이셨다. 말씀도 그리 많지 않으시고 약간은 무뚝뚝하시면서 고집 또한 강한 분이셔서 쉽게 친해지기는 어려웠지만 속정이 깊으신 분이셨고, 택견꾼으로서 자부심과 긍지가 대단할 뿐만 아니라 자존심이 몹시 강한 어른이셨다. 택견을 많은 사람에게 전수하지 못한 큰 이유 중의 하나는 스승님의 이러한 성격 때문일 것이라는 것이 스승님을 잘 아는 사람들의 공통적인 의견이다. 사귀기도 어려울 뿐만 아니라 황소고집 인데다가 무뚝뚝하기가 이를 데 없으니 조분 조분하게 남을 잘 가르쳐 줄 리가 없고 그 높은 자존심 때문에 웬만큼 머리를 조아리지 않고는 배우기가 쉽지 않았을 것이다. 그래서 택견을 배우고자 스승님을 찾아 왔었던 상당수의 사람들이 스승님의 그런 태도에 늙은이가 알면 얼마나 안다고 또는 뭐 그리 대단한 것도 아닌 걸 가지고 유세를 떤다며 쉽게 떠나 버리거나 아니면 자신들 상상에 의해 택견을 오판했던 것이다. 그러나 스승님의 택견에 대한 자부심과 긍지, 그리고 애착은 정말로 남다른 것이었다.



1958년도쯤에 경무대 경찰서의 ‘이승구경관’이 스승님이 택견의 달인(達人)이라는 소문을 듣고 찾아와 ‘이승만대통령’께 시범을 보여 달라는 부탁을 했다. 택견은 어떤 일정한 형(型)이 있는 것이 아니고 둘이 맞서서 견주어 상대를 제압하는 실전(實戰)기예인 만큼 혼자 시범을 보이기가 마땅치 않았던 스승님은 옛날에 임호선생님께 택견을 같이 배운 적이 있는 ‘김성한(金成漢)’이라는 분을 불러 한달 정도 가르치면서 준비를 하셨다. 1958년 3월 26일, ‘이승만대통령 생신 축하 경찰무도대회’가 당시 중구 소공동에 위치해 있던 ‘유도회관’에서 열렸는데, 그 곳에서 조선의 마지막 택견꾼들의 시범이 벌어졌던 것이었다. 그러나, 당시 택견을 지켜보았던 이 땅의 지식인들과 무도인들은 직선적이고 절도 있는 일본류(日本流)의 무술에 익숙해 있던 터라, 춤사위 같은 부드러움 속에 기(氣)가 배어있는 택견의 굼실거림에 아무런 관심을 주지 않았다. 택견에 대한 깊은 애착과 택견꾼으로서 자부심이 강했던 스승님께서는 몹시 자존심이 상하시고 섭섭하셨지만, 당신이 실존(實存)하는 민족무예(民族武藝)의 마지막 기능보유자라는 시대적 사명감까지는 없으셨다고 하셨다. 남들이 알아주는 것과 상관없고 너희들이 무엇을 알겠느냐는 식의 스승님의 자존심은 당신의 마음만 상하시고, 택견을 부활시킬 수 있었던 좋은 기회는 그렇게 흐지부지 넘어가고 말았던 것이다.



그러나 이승구경관이 송덕기스승님께 택견 시범을 청했던 까닭이 이승만대통령께서 평소에 개인적으로 택견을 좋아하셨기 때문인 만큼, 인연이 그렇게 끝나지만은 않았다. 이대통령께서는 개인적인 성향으로 택견을 좋아하시기도 하셨지만, 외래의 어떤 무술보다도 우리무술을 발전시켜야 한다는 민족정신으로 택견을 아주 소중하게 생각하셨단다. 그래서 당시 ‘경무대(현재의 청와대)’의 경호원들을 가르치는 무도사범(武道師範)으로 있던 ‘박철희사범’에게 송덕기옹을 만나 택견의 기술을 많이 배우고 접목시키라고 하셨다고 한다. 그렇게 하여 박철희사범님과 송덕기스승님의 인연이 시작되었다. ‘박철희사범님’은 1933년 생으로 ‘태수도협회’ 초대 전무이사를 지내셨고, 1954년에는 ‘육군사관학교’의 초대 태권도 교관을 지내셨다. 1956년에는 ‘경무대’의 명예무도사범을 지냈는데, 이 때 송덕기스승님을 처음으로 만나게 된 것이다. 박사범님께서는 송덕기스승님을 경무대에 있던 경호원들의 도장인 ‘상무관(尙武館)’으로 자주 초청하여 당시 이승만대통령의 경호원들이 택견의 술기를 지도 받을 수 있도록 하셨다.



1960년 ‘제17회 로마올림픽’ 때 출전하게 된 한국 대표팀이 한국의 문화를 소개하는 전시장에 전시할 한국 문화를 대표하는 내용 중의 하나로 전통무예인 ‘택견’을 채택하였다. 그래서 그 당시 ‘문교부 체육과’의 요청으로 스승님께서는 택견동작의 사진촬영을 하게 되셨다. 송덕기스승님께서는 당신의 가장 미더운 제자인 박사범님과 함께 ‘경복궁’에서 사진 촬영을 하셨는데, 당시에는 경복궁이 일반인에게는 출입이 금지되어 있었으나 경무대의 무도사범 등을 지낸 배경과 문교부의 적극적인 지원으로 촬영을 할 수 있으셨다. 그 때 찍은 사진들이 여러 장 남아있는데 아마도 현존하는 스승님의 가장 오래 된 택견 모습일 것이다. 박철희사범님은 경무대의 무도사범을 그만 둔 후에도 개인적으로 택견을 좋아하셔서 ‘사단법인 택견무도원’을 설립하려고 열심히 노력하셨다. 송덕기스승님께서도 전폭적인 믿음과 지원으로 법인 설립이 거의 이루어지기 직전에, 그 당시 막강한 힘을 지니고 있던 ‘수박도협회’의 방해공작(박철희사범님의 말씀)으로 어려움에 빠졌다. 그런 와중에도 박사범님은 나름대로의 배경으로 그 일을 계속적으로 추진하셨으나, ‘4.19 학생의거’와 ‘5.16 군사혁명’이 연이어 터지면서 전국이 어지러워져 법인문제가 흐지부지되었고 본인은 여러 가지 사정으로 뜻을 이루지 못한 채 결국 홀로 미국으로 건너가시게 되셨으며,그로 인해 스승님과 택견과의 인연이 끊어졌다고 한다. 그것은 택견이 법인이 되어 조직적인 발전을 할 수 있었던 좋은 기회를 놓친 것이고 스승님 개인에게는 훌륭한 제자를 잃어버린 안타까운 일이기도 했다.

그러나, 당시 박철희사범님의 조교로 있었던 ‘김병수사범’이 송덕기스승님과의 만남을 계속하였다. 김병수사범님 또한 스승님과 같은 사직골의 토박이로 어려서부터 운동을 좋아하셨고 일찍부터 당수도(唐手道)를 익힌 계기로 무도에 뜻이 있어, 마침 동네의 어른이신 송옹과의 인연을 평생 끊지 않으셨다. 김병수사범님은 1939년생으로 현재의 광화문 앞 체신부 자리였던 곳에 위치한 ‘창무관’에서 당수도를 시작하셨다. 1957년 외국어대학교에 재학 중일 때 경무대에서 부사범으로 있었는데, 송덕기옹이 경무대를 자주 방문하여 알게 되셨다고 한다. 1958년에 외국어대학교에 ‘택견권법부(현 태권도부의 전신)’를 만들었고, 1963년에는 현재의 광화문 옆 효자동 오리온 다방 3층에 도장을 차리기도 하셨다. 대학 때부터 미국의 무술잡지 ‘블랙 벨트(Black Belt)'의 한국기자를 하면서, 1964년도쯤에 ‘블랙벨트(Black Belt)'와 ‘가라데 일러스트레이트(Karate Illustrate)'라는 미국의 유명한 무술잡지에 택견에 대한 기사를 기고한 적도 있으니, 아마도 그것이 공식적으로 택견이 외국에서 기사화 된 처음이 아닌가 한다. 그러나 김병수사범님은 무도사범으로서 국내보다는 외국에서 성장하고 싶다는 간절한 바람으로 1968년 1월 16일 무작정 미국으로 도미(渡美)를 하였으니 그것으로 스승님은 또 한 분의 중요한 제자를 잃고만 셈이 되고 말았다.

김병수사범님은 천신만고의 고생 끝에 지금은 텍사스주(Texas)의 휴스턴(Houston)을 중심으로 ‘김수가라데’라는 타이틀로 이름을 떨치게 되었다. 휴스턴 시(市)에서는 김병수사범님의 문화?체육적 공로를 인정하여 ‘김수의 날(The Day of Grandmaster Kim Soo)’을 지정하였는가 하면, 김병수사범님께서는 지관도 여러 나라에, 여러 개를 갖고 계신 세계적인 무도인이 되셨다. 최근에는 ‘자연류무술’이라는 새로운 체계의 과학적인 무술을 창안하셔서 크게 활동을 하는 성공한 동양무도인으로 많은 미국인들로부터 존경을 받는 분이시다. 얼마 전 한국에 오셨을 때 결련택견협회 선생들을 모아놓고 특강을 부탁드렸는데, 필자는 물론이고 택견선생들 모두가 뛰어난 그 분의 ‘자연무술 철학’에 크게 감동을 받았다. 김병수사범님은 송덕기스승님을 존경하기도 하고 좋아하기도 하여 스승님 생전에는 한국을 방문할 때마다 반드시 스승님을 찾아뵙고 인사를 올렸다. 1971년에 김사범님의 초기 제자 중의 한 명인 ‘죤쿤(John Coon)’이라는 미국인을 데리고 노인정으로 찾아가 이분이 바로 태권도의 ‘그랜드 마스터(Grand Master)’라고 소개를 하자, 그 미국인이 연로하신 무예의 고수를 만난 것이 얼마나 감격스러웠던지 덥석 큰절을 올렸다고 한다. 그러자 노인정에 같이 있던 노인네들이 모두 부러워했고 스승님은 상당히 흐뭇해 하셨다고 술회하셨다. 1972년에는 태권도계의 임창수사범이 스승님으로부터 2달여 정도 본격적으로 택견을 지도 받았으나 그 분 또한 그것을 끝으로 미국으로 떠나고 마셨으니, 1985년도에 스승님을 버리고 훌쩍 유학을 가버린 필자를 포함하여 송덕기스승님과 미국과의 인연은 참으로 깊다하지 않을 수 없겠다.



 1972년 ‘태권도 가을호’에 스승님께서 ‘살아있는 태권도인’으로 소개되면서 태권도계에서 많은 사람들이 찾아와 택견을 배우려고 하였고 태권도와의 접목을 시도하면서 태권도계의 고수로 추켜세워 주었지만, 택견을 제대로 배우려는 사람도 없었고 실질적인 생활에 도움도 주지 않아 그것도 그냥 스쳐 지나가는 인연이 되고 말았다. 그 외에도 가끔씩 어떤 단체나 언론 등에서 스승님을 전통무예의 고수(高手) 내지는, 우리문화의 산 증인으로 소개했고, 특히 1981년에는 ‘제 1회 대한민국 전통무도 예술제’에서 ‘무도대상(武道大賞)’을 타기도 하셨지만, 슬하에 자녀도 없고 스승님을 모시는 제자도 없으신 스승님의 생활은 연세가 드실수록 어려워지기만 했다.



1970년 중반부터 신한승선생님이 전통무예인 택견을 바로 세워보고자 하는 굳은 신념으로 충청북도 충주에서 찾아와 택견을 제대로 배우기 시작하였으나, 신선생님 또한 경제적으로 어려운 처지인데다 생활 터전이 충주여서 스승님의 생활에는 도움을 드리지 못했다. 운동뿐만이 아니라 손재주도 좋으셨던 스승님께서는 한때 연을 만들어 1개에 500원씩 수출업자에게 넘기기도 하셨고, 복덕방 일도 하시는 등 이런저런 일들을 해보셨으나 힘든 생활의 연속이셨으니, 반만년을 이어온 민족무예 택견의 유일한 계승자의 말년으로서는 너무나 안타까운 현실이었다. 그러던 중, 1979년 12월 26일에 서로 의지하며 노년기를 보내시던 사모님마저 세상을 떠나셔서 더욱 외롭고 쓸쓸한 생활을 하시게 되었다. 그러나 충주의 신한승선생님은 택견이 제대로 보존되고 발전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택견을 무형문화재로 지정받게 하는 일이라 굳게 믿고 있었으므로 열심히 문화재관리국을 드나들며 택견을 문화재로 지정받게 하고자 계속적으로 노력을 하였다. 전통무예에 대한 인식이 부족하였던 당시의 상황도 상황이지만 무엇보다도 안타까운 것은 문화재관리국에서 조차 택견 그 자체의 가치를 몰라주고 좀 더 체계적이고 많은 양의 조사 자료만을 요구하였다. 신한승선생님은 전국 각지를 돌며 자료를 수집하면서 택견을 문화재관리국에서 요구하는 양식으로 만들기 위해 열심히 노력하였지만, 송덕기스승님은 그러한 신한승선생님의 행동을 못마땅하게 생각하셨다. 그러나 신한승선생님은 굳은 신념과 의지로 택견을 문화재관리국의 양식에 맞춰 보고서를 작성하였고 마침내 택견이 ‘국가 중요무형문화재’로 지정받게 되었으니, 비로소 택견이 거의 일백년 만에 세상의 밝은 빛을 보게 되는 쾌거를 이룬 셈이라 하겠으나, 이것이 또한 택견을 분열시키는 원인이 되기도 했다. 택견 체계의 변형을 초래하면서도 문화재지정을 통해 발전시키고자 했던 신한승선생님의 노력이 옳았던가, 아니면 송덕기스승님의 택견이 문화재로 지정받지 못하더라도 원형만을 고스란히 지키는 것이 옳았던 것일까에 대한 역사적 판단은 좀 더 많은 시간이 필요하리라 본다.



송덕기스승님은 택견꾼으로서만이 아니라 평생을 활을 쏘신 황학정(黃鶴亭, 우리나라 국궁 1번지로 불리우는 활터. 종로구 사직동 인왕산 끝자락에 위치)의 지킴이로서 황학정의 많은 일들을 앞장서 해결하시곤 하셨다. 젊은 시절부터 활터에서 행패를 부리거나 예의 없이 행동하는 사람들을 혼내주는 일을 도맡아 하시어 모든 이들이 송덕기스승님을 ‘사직골 호랑이’라고 불렀으니 인왕산 호랑이였던 당신의 스승이신 임호선생님에 이어 ‘호랑이계보(?)’를 이룬 셈이라 하겠다. 원래 황학정은 ‘경희궁’ 내에 있었던 것으로 국왕께서 활을 쏘시던 곳이었는데, 한일합병 후 일본인들이 경희궁을 철거하려고 하자, 당시 활 쏘는 사람들 중 뜻있는 몇 분들이 여러 방면으로 로비를 하여 황학정을 현재의 활터로 해체하여 옮겨왔다고 한다. 송덕기스승님께서도 당시 황학정을 직접 해체하고 옮겨 와 재조립한 분들 중의 한 분으로 그만큼 활터에 큰 애착을 가지고 계셨다. 평생을 활을 쏘셨던 스승님께서 돌아가시기 바로 몇 해 전에 더 이상 재미가 없다며 활을 놓으신 것이 아마도 스승님의 작고를 예언하는 것이 아닌가 할 정도다.



스승님은 1982년도부터 당시 대학교 2학년이었던 필자를 가르치는 것을 시작으로 젊은 제자들을 지도하기 시작하셨다. 그러던 중, 1983년 ‘국가중요무형문화재 제76호 택견의 기능보유자(인간문화재)’로 지정되셨고, 그것을 기념하기 위해 당시 지도하고 있던 어린 제자들과 함께 ‘택견계승회(현재의 사단법인 결련택견협회의 모체)’라는 조그마한 모임을 만드셨다. 그리고 택견을 좀 더 본격적으로 지도하기 위해 이듬해인 1984년도에는 스승님 댁 근처의 ‘박민태권도 도장’을 새벽에, 후에는 저녁시간에 임대하여 제자들을 지도하셨다. 그러다가 제자들 중 에서 맏형 역할을 하고 있던 필자가 1985년에 미국으로 유학을 떠나면서체계적으로 조직을 관리할 사람이 없어 제자들의 모임이 크게 위축 되는 듯 하였다. 그러자 제자들 중 비교적 집안 형편이 넉넉하였던 막내 ‘최유근’이 부모님께 부탁드려 그 이듬해인 1986년도에 서울 신촌 로타리 부근에 ‘택견보존회’라는 이름으로 최초의 사직골 택견의 맥을 잇는 본격적인 택견전수관을 개관하여 새로운 활로를 찾는 듯 했다. 스승님께서도 몹시 기뻐하시며 사직동에서 신촌까지 거의 하루도 거르지 않고 나오셔서 제자들을 돌봐주시며 택견의 맥을 이으려고 노력하셨다. 그러나 택견이라는 생소한 우리문화에 대한 일반인들의 인식부족과 체육관을 운영해 본 경험이 전혀 없는 제자들의 운영미숙으로 전수관은 늘 적자에 시달렸고 결국은 1년이 못되어 문을 닫고 말았다. 그러면서 남아있던 제자들도 군에 입대하게 되엇고 뿔뿔이 흩어지기 시작하여 1987년쯤에는 특별히 지도할 제자들도 없고 활도 놓으시고는 가끔씩 문안인사차 찾아오는 제자들을 만나면서 노인정을 들르시는 일로 여생을 보내셨다. 그러던 어느 날, 감기 몸살기가 있고 힘이 없다며 입원하신 서대문 적십자병원에서 1987년 7월 22일 별세하셨다.



송덕기스승님께서는 정치적으로나 사회적으로 큰 업적을 남기신 분은 아니지만 우리민족의 상무정신이 깃든 전통무예 택견을 이어주신 유일한 분이기에 그것만으로도 그 분의 삶은 소중한 가치가 있는 것이다. 특히 뛰어난 운동신경과 대담한 용기, 그리고 한량적 기질은 온전하게 택견의 모습이 지켜질 수 있게 한 바탕이 되기도 했다. 후세인들이 어리석게도 택견의 가치와 소중함을 몰라 송덕기스승님을 너무 외롭게 살다 돌아가시게 하였으니 제자로서, 또한 이 땅의 후예로서 그저 부끄러울 따름이다. 우리가 배워야 할 것은 단순히 택견의 기예만이 아니라 송덕기스승님의 몸속에 깃들어 있는 택견의 소박하고 민중적이면서도 여유롭고 풍족한 풍류의 멋이고 또 그 속에 담겨 있는 조상들의 드높은 기상임을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빌며 우리무예 택견의 올바른 계승과 무궁한 발전을 기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