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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에 들어 ‘택견’에 대한 공식적인 첫 기록은 1964년 5월 16일자 ‘한국일보’에 실린 ‘속인간문화재(續人間文化財)-택견 송덕기’라는 기사이다(사진1. 참고). 이 글을 쓴 문화재전문위원 ‘예용해 선생(芮庸海,1929~1995)’은 전통문화와 택견에 대한 깊은 애착으로 1973년 ‘택견조사보고서’를 작성하는 등 택견의 보존에 큰 정열을 쏟았다.


사진1. 현대에 들어 ‘택견’에 대한 공식적인 첫 기록인 1964년 5월 16일자 ‘한국일보’에 실린 송덕기옹에 관한 기사


그러나 당시 예용해 선생은 보고서에서 ‘송덕기옹이 보유하고 있는 택견이 한국 전래의 고유무예임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으나 남아있는 기술이 11가지밖에 되지 않아 문화재로 지정하기에는 큰 난점이 있다’며 안타까워했다. 여러 상황으로 보아 분명히 더 많은 기예가 존재했을 것이라는 확신은 있었으나 전통무예에 대한 연구가 전무한 당시 상황에서, 그것도 무형문화재가 아닌 유형문화재 전문위원으로서 그 이상의 접근은 어려웠다고 한다.

그러던 중 전통무예에 깊은 관심을 갖고 있던 신한승 선생(辛漢承, 1928~1987)이 예용해 선생과의 인연으로 1970년대 초반부터 본격적인 택견의 연구와 정리 작업에 착수하였다. 그 전후 시기에도 송덕기옹의 택견을 전수받았던 사람들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모두가 여러 가지 사정으로 오래가지 못하고 중도에 포기하고 말았다. 특히 안타까운 것은 ‘대한태권도협회’의 ‘임창수 사범(현 재미 무도인)’이 송옹으로부터 택견을 사사받았고 그에 관한 기록이 ‘태권도지, 1971년 가을호’에 실렸다는 점이다. 여기에는 예 선생의 연구조사에는 없는 몇 가지 기술들이 더 소개되어 있어 큰 가치와 의미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임사범이 갑자기 미국으로 건너감으로써 태권도협회를 중심으로 한 택견연구가 중단되고 말았다는 것이다(사진2. 참고).
  

신한승 택견의 문화재 지정
  

사진2


하지만 신한승 선생은 외길 집념으로 택견에 모든 것을 걸었다. 송옹으로부터 사사를 받기 위해 생활터전인 충주(忠州)에서 서울의 사직동으로 수 십 차례 왕복하면서 거리상의 문제와 경제적인 어려움으로 큰 고초를 겪어야만 했다. 그렇게 힘든 와중에도 개인의 성취감은 물론이고 보존과 보급을 위해서는 택견을 문화재로 지정받게 하는 것이 급선무라 믿고 그 동안의 연구 결과를 ‘문화재관리국(현 문화재관리청의 전신)’에 제출했으나 남아있는 기술과 체계가 부족하다는 이유로 번번이 거절당하고 말았다. 그동안의 연구에서 알게 된 송옹의 30가지 정도의 기예에 이미 택견의 우리무예적인 특성과 구성원리가 충분히 담겨져 있었지만 전통무예에 대한 학술적인 토대가 전혀 없었던 그 시기에는 아무도 그 맛과 의미를 알지 못했던 것이다.

택견을 쉽게 이해하려면 또 다른 민족기예인 ‘씨름’을 생각해 보면 된다. 씨름 또한 힘을 겨루는 우리민족 고유의 무예이지만 중국무술처럼 화려하고 많은 기술이 있는 것이 아니고 일본무도처럼 조직적인 체계가 있는 것도 아니다. 만약 씨름이 끊기게 되어 문화재로 지정하려고 한다면 몇 가지가 안 되더라도 남아있는 낱개 형식의 기술과 규칙 등을 통한 경기방식과 상황적 배경 등을 보존해야 할 것이다. 택견 역시 그러해야 하는데 민속학(民俗學)이나 문화인류학(文化人類學) 등의 문화적인 학문이 발전되어 있지 않던 그때 상황에서는 택견을 기존의 외래무술을 기준으로 하는 시각에서 바라보았던 것이다.

송옹의 택견만을 가지고는 문화재 지정이 어렵다고 판단한 신 선생은 전국을 돌며 택견으로 추정되는 기예들을 채집하여 택견의 기예 숫자를 늘렸고 송옹 외에 다른 분에게도 택견을 전수받은 것을 포함하는 전승계보를 만들었다. 하지만 그것들은 안타깝게도 연로해서 거동이 불편하거나 이미 사망해서 확인이 불가능한 분들이었기 때문에 확실한 근거는 없다. 어쨌든 신 선생은 문화재관리국의 입맛에 맞게 택견의 양을 늘리고 당시 성행하는 ‘태권도, 합기도, 쿵푸’ 등의 수련체계를 차용하여 ‘본때뵈기’라는 품새형식의 수련체계와 ‘동, 째(태권도의 段, 級과 같은 것)’라는 등급제도를 만드는 등 기존의 타 무술에 뒤지지 않는 조직적이고 체계적인 택견으로 발전시켰다.

그것을 신한승 선생의 친구이자 외국어대학교 교양체육부의 오장환교수가 정리하여 문화재 지정신청을 하였다. 이러한 피나는 노력에 힘입어 문화재 전문위원 임동권박사가 오장환 교수의 보고서를 토대로 1982년에 방대한 양의 ‘무형문화재조사보고서 제146호 : 택견’을 작성하여 마침내 택견이 ‘국가중요무형문화재 제 76호’로 지정되었다(1983.6.1).

택견이 문화재로 지정된다는 발표를 신문을 통해 처음 알게 된 신한승 선생은 신문을 받아 보고는 너무 기쁜 나머지 어린애처럼 펑펑 울었다고 한다. 택견을 연구하기 위해 수많은 고초와 경제적인 어려움, 그리고 쓸데없는 짓을 한다는 주의의 질타 속에서 굳건히 지켜온 신념이 마침내 인정을 받게 되었으니 그 기쁨이야 어찌 말로 형언할 수 있었겠는가! 그것은 신한승 선생 한 개인의 승리가 아니라 꺼져가는 민족무예의 불씨를 일으킨 우리역사의 장대한 쾌거였던 것이다.

그렇지만 문화재로 지정된 택견은 당신의 스승이신 송덕기옹의 택견과는 사뭇 다른 것이었다. 문화재관리국은 신 선생의 택견을 문화재로 지정하고 신 선생을 인간문화재(기능보유자,이하 인간문화재)로 지정하려고 하니 신선생의 스승인 송덕기옹이 멀쩡하게 살아있고, 그렇다고 송옹을 인간문화재로 지정하자니 송옹은 문화재로 지정된 신선생의 택견을 할 수가 없고 참으로 난감한 상황이 되고 말았다. 그리하여 인간문화재 지정 사상 처음으로-아마도 마지막이 되겠지만- 스승과 제자가 동시에 인간문화재로 지정되는 기이한 결과를 초래하게 되었다.(사진3 참고)
  

원형 택견과 문화재 택견의 갈림


사진3. 스승과 제자가 동시에 ‘택견기능보유자(인간문화재)’로 지정된 인정서



이것이 현재 택견분란(紛亂)의 가장 큰 원인 중의 하나인 송덕기옹의 원형택견과 신한승 선생의 문화재택견이라는 두 가지 형태의 택견이 생긴 시발점이다. 결국 택견의 무형문화재 지정은 택견이 잘 보존되고 크게 발전할 수 있는 절호(絶好)의 기회이기도 했지만, 택견이 조각나고 분란이 시작되는 주원인이 되기도 하였으니 인생사 ‘새옹지마(塞翁之馬)’라는 옛 선인들의 말씀이 떠오를 정도로 안타까울 뿐이다.

송덕기옹과 신한승 선생 택견의 차이점에 대해서는 다음에 연재할 ‘택견이야기 아홉’에서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해보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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